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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신고전주의 미술: 고전의 열기

by MagisBonum 2024. 12. 2.

신고전주의 미술: 고전의 열기

 

1780년부터 1820년까지 유행했던 신고전주의는 “영광은 그리스의 것이요, 위대함은 로마의 것이다”라는 에드거 앨런 포의 시를 상징적으로 반영하는 예술 사조였다. 회화, 조각, 건축, 가구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엄격한 고전 양식을 되살린 신고전주의는 장식적이고 감각적인 로코코 양식에 대한 반작용으로 탄생했다. 18세기는 계몽주의 사상으로 철학자들이 이성과 논리를 강조하며 새로운 사회적 이상을 설파하던 시대였다. 이러한 이성에 대한 믿음은 신고전주의에서 질서와 고귀함이라는 미덕을 다시 강조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19세기 초, 자크 루이 다비드(1748~1825)가 이 양식을 완전히 정착시키며 신고전주의를 대표하는 상징적 인물로 자리매김했다. 그는 그리스와 로마 미술의 이상을 새로운 프랑스 공화국에 알맞게 적용하며 민주주의적 가치를 예술로 표현했다.

 

독일 작가 괴테는 신고전주의의 본질을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은 영웅주의와 시민적 덕목”이라고 요약했다. 신고전주의 미술은 이러한 가치들을 구현하며, 로코코의 방탕하고 경박한 사교계 문화와 쾌락 추구에서 벗어나 애국적이고 도덕적인 주제를 강조했다. 고대의 역사나 신화에 바탕을 둔 진지한 서사적 이야기들이 주를 이루며, 당시 사회에 필요한 규율과 윤리를 미술을 통해 표현하려는 시도가 이 사조의 핵심이었다.

 

고전의 부흥과 열기

 

1738년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 유적 발굴은 고대 미술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전 유럽은 고고학적 발견의 열기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리스와 로마의 예술을 되살리려는 열망은 건축, 회화, 조각뿐만 아니라 의상과 생활용품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고대를 모방하려는 열기는 때로는 우스꽝스러운 결과를 낳기도 했다. 다비드의 제자들처럼 그리스 문화를 충실히 재현하려고 짧은 튜닉을 입고 다니거나 강에서 나체로 목욕하는 등의 행동이 그런 사례였다.

 

엘진 경이 그리스 파르테논에서 가져온 대리석 부조들이 런던에 전시되면서 고전에 대한 열기는 더욱 고조되었다. 시인 존 키츠는 이 대리석 부조들을 보며 “인간 지능의 승리요, 그리스인의 위대함”이라 찬탄했다. 프랑스와 영국의 왕립 아카데미는 감성보다는 이성을 중시하는 교훈적 예술을 강력히 지지하며, 선과 소묘가 색채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했다. 신고전주의 회화의 특징은 매끄럽고 붓자국이 보이지 않는 화면 처리, 엄격하게 소묘된 인물들, 그리고 로마 부조 조각처럼 원근감이 적은 구성이었다. 배경은 로마적 요소인 아치나 원주로 장식되었고, 복잡한 곡선 대신 단순하고 조화로운 직선과 비례가 강조되었다.

 

고대의 폐허는 건축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러시아부터 미국까지 수많은 건축물이 그리스 로마 신전을 본떠 지어졌다. 파리의 팡테옹, 베를린의 브란덴부르크 문, 그리고 토머스 제퍼슨이 설계한 몬티첼로 저택은 그리스 로마 건축 양식을 충실히 재현한 대표적 사례들이다.

 

프랑스 신고전주의

 

자크 루이 다비드: 복고풍 회화의 선구자

 

자크 루이 다비드는 로마 여행 중 처음으로 고전 미술을 접하며 그 강렬한 영향을 깊이 체감했다고 한다. 그는 당시 경험을 “마치 백내장 수술을 받은 듯 시야가 열렸다”고 비유했다. 고대 유적지를 답사하며 그는 모든 유적을 스케치하며 “순수한 그리스 양식을 구현하고 싶다”고 적었다. 다비드와 그의 제자들은 로코코 양식에 반감을 표하며, 와토의 <시테라 섬의 출항>과 같은 작품을 경멸해 빵 조각을 던지는 행동으로 반발했다.

 

다비드의 대표작인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는 세 형제가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을 맹세하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이 작품은 방탕한 사치 대신 자기희생과 금욕주의를 강조하며 프랑스 혁명 당시 새로운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했다. 화면 속 남성 형제들은 딱딱하고 직선적인 윤곽선으로 묘사되어 강인함을 나타내며, 반대로 여성들은 부드럽고 곡선적인 윤곽선으로 그려져 성별 간의 역할 차이를 강조한다. 인물들은 고대 조각처럼 배열되었고, 배경의 로마식 아치는 그들을 돋보이게 하는 평면적 무대를 제공한다. 다비드는 작품의 인체를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 인형에 로마식 의상과 헬멧을 씌워 모형을 참고하며 작업했다.

 

다비드는 급진적인 혁명가 로베스피에르와 가깝게 지내며 열렬히 혁명을 지지했으며, 루이 16세의 처형에도 찬성표를 던졌다. 그의 예술은 공화국을 홍보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었으며, 스스로 “조국에 대한 헌신과 영광의 씨를 심는 일에 기여한다”고 언급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그려진 <마라의 죽음>은 다비드의 걸작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마라는 욕조에서 서신을 작성하다 암살당했는데, 다비드는 사건 직후 현장을 스케치해 마라를 순교자로 이상화했다. 마라의 자세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를 연상시키며 그의 죽음을 숭고한 희생으로 승화시켰다. 피 묻은 칼과 수건, 단순한 나무 상자와 같은 요소들은 혁명 정신을 강조하는 상징으로 작품에 포함되었다.

 

로베스피에르가 실각하고 처형되자 다비드는 감옥에 갇혔으나, 정치적 변화에 빠르게 적응하여 나폴레옹의 수석 화가로 활동을 이어갔다. 그의 <나폴레옹 황제의 대관식>에서는 혁명기의 간결하고 금욕적인 구도 대신 나폴레옹의 취향에 맞춘 화려하고 장엄한 양식을 채택했다. 색감은 더욱 화려해졌고 화면은 매끈하게 처리되었으며, 여전히 “붓자국이 드러나지 않아야 한다”는 다비드의 철칙을 따랐다. 그의 예술은 19세기 프랑스 미술계와 유럽 전역에서 공식적인 모델로 자리 잡았다.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기교의 화가

 

다비드의 제자인 앵그르(1780~1867)는 신고전주의의 계승자이자 완성자로 평가받는다. 그는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불리며 열한 살에 미술학교에 입학했고, 열일곱 살에는 다비드의 화실에 합류했다. 앵그르는 스승 다비드보다 더욱 고전에 충실했으며, 초기 작품에서는 그리스 도기화에서 영감을 얻어 평면적이고 선을 강조한 소묘 스타일을 선보였다. 이러한 경향은 비평가들로부터 ‘원시파’ 혹은 ‘고딕파’로 불리기도 했다.

 

당시 낭만주의 화가들이 감성과 색채를 중시하며 미술계를 흔들고 있었지만, 앵그르는 전통적 제작 기법을 옹호하며 “소묘야말로 진정한 미술이다”라고 주장했다. 낭만주의자들의 선구자인 들라크루아와의 경쟁은 치열했으며, 앵그르는 루벤스를 “플랑드르의 푸줏간 주인”이라고 부르고 들라크루아를 “악마의 가면을 쓴 자”라고 비난했다. 반대로 낭만주의자들은 앵그르의 작품을 ‘빛바랜 소묘화’라고 비판하며 반격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앵그르는 종종 자신의 규율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작품을 창작했다. 그의 대표작 <대 오달리스크>는 르네상스의 이상적 미와는 거리가 있으며, 길게 늘어난 인체는 마니에리즘의 영향을 보여준다. 그는 하렘의 여인이나 이국적인 주제를 즐겨 그렸으며, 관능미를 강조하기 위해 인체를 과장하기도 했다. 이 작품은 비현실적인 신체 비례로 비판을 받았지만, 여인의 우아함을 극대화하며 관능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했다.

 

앵그르는 또한 초상화의 대가로, <드 브로그리 왕자비의 초상>에서 정밀한 세부 묘사와 매끄러운 화면 처리를 보여준다. 그의 작품은 빳빳한 옷감, 머리칼의 결, 섬세한 피부를 도자기처럼 묘사하며, 붓자국 하나 보이지 않게 완벽히 완성되었다. 그는 사진처럼 정확한 외모 묘사로 역사상 최고의 초상화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미국 신고전주의

 

신고전주의와 미국 독립

 

미국 독립과 신고전주의의 유행은 시기적으로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 로마 공화정을 이상적인 모델로 삼았던 미국은 새로이 형성된 국가의 정체성을 반영하기 위해 고대 로마의 양식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상원(Senate)’이나 ‘의사당(Capitol)’ 같은 용어는 물론, 워싱턴 D.C.에 건립된 공공 건축물들도 고전 양식을 본뜬 신고전주의 건축물로 설계되었다. 이러한 양식은 독립 이후 약 100년 동안 미국의 공공건축에 주요한 스타일로 자리 잡았다.

 

특히 신고전주의 건축의 확산에 있어 토머스 제퍼슨의 역할은 대단히 중요했다. 그는 아마추어 건축가로서 고전 건축을 도입하려는 열망을 실현시켰으며, 버지니아 대학을 설계할 때 이를 구현했다. 그는 판테온을 닮은 원형 건물과 로마 신전을 모방한 누각을 배치하여 도리아식, 이오니아식, 코린트식의 고대 원주 양식을 모두 활용했다. 제퍼슨의 디자인은 학생들에게 고전주의 건축을 직접 경험하고 학습할 기회를 제공했으며, 신고전주의 건축의 이상을 상징적으로 드러냈다.

 

조각과 신고전주의

 

조각 분야에서도 고대 인물의 이상화된 모습을 재현하는 고전 양식이 크게 유행했다. 히람 파워스의 <그리스 노예>(1843)는 그 대표적인 예로, 사슬에 묶인 발가벗은 소녀의 형상을 통해 고대적 미와 이상을 구현하며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가 항상 성공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예컨대, 호라쇼 그리너프가 제작한 <조지 워싱턴>상은 누드 상태로 로마식 샌들을 신은 워싱턴의 모습이 일반 대중에게 큰 반감을 사 웃음거리로 전락했다.

 

벤자민 웨스트: 미국의 첫 국제적 화가

 

미국 태생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첫 화가는 벤자민 웨스트(1738~1820)였다. 그는 미국 신고전주의 양식을 대표하는 화가로, 특히 전쟁화를 통해 큰 명성을 얻었다. 웨스트는 영국 왕립 아카데미의 원장을 역임하며 영국에서 활동했으며, 생애 대부분을 런던에서 보냈다. 그의 화실은 당시 미국 화가들이 유럽 미술계와 연결될 수 있는 중요한 교두보 역할을 했다. 그는 사후 영국 세인트 폴 대성당에 묻히며 국제적으로 그의 업적을 인정받았다.

 

미국 미술의 초기 단계

 

발전의 더딘 걸음

 

재능 있는 미국 화가들 대부분이 유럽에서 활동하면서 본국 미술의 발전은 상대적으로 더뎠다. 초기 미국은 농업 중심의 경제 구조로 인해 미술보다는 실용적인 분야에 더 많은 관심이 쏠렸다. 화가들 역시 주로 농민층 출신이거나 간판 제작자로 시작한 경우가 많았다. 또한, 청교도 교회의 금욕적 문화는 미술 후원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고, 사치스러운 건축물이나 미술품 구매를 위한 재정적 여력도 부족했다.

 

초기의 미술 작품은 주로 은제품, 가구, 묘지 조각과 같은 공예품에 국한되었으며, 회화는 초상화가 중심이었다. 개인주의를 중시하는 미국 정치 제도는 초상화의 발전에 기여했으며, ‘떠돌이 환쟁이’라 불리던 화가들은 고객의 얼굴 없는 초상화를 먼저 그려둔 뒤, 후에 얼굴 부분을 완성하는 방식으로 그림을 판매했다.

 

찰스 윌슨 필: 미국의 르네상스적 인물

 

찰스 윌슨 필(1741~1827)은 다재다능한 예술가이자 과학자로, 미국의 르네상스적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화가로서 두각을 나타내기 전, 마구 제작, 시계 제조, 은 세공, 가구 제작 등 다양한 직업을 전전하며 경험을 쌓았다. 독립전쟁에 참전했던 그는 정치인, 발명가로도 활동하며 다방면에서 재능을 발휘했다. 그가 발명한 안경, 증기 목욕탕, 연료 재활용 난로 등은 그의 창의성을 잘 보여준다.

 

필은 또한 거대한 코끼리 화석을 발굴해 자신이 설립한 자연사 박물관에 기증하며 박물학에도 관심을 보였다. 필라델피아의 이 박물관은 약 10만 점 이상의 유물을 전시하며 미국에서 최초의 본격적인 자연사 박물관으로 자리 잡았다. 그는 식민지 최초의 미술관과 미술학교도 설립하며 미국 미술의 발전에 기여했다.

 

그의 초상화 작품 <콩코르디아 아니마(영혼의 조화)>는 가족 구성원 9명과 유모를 묘사하며 그의 미술적 능력과 가족에 대한 애정을 동시에 드러냈다. 그림 속 필은 왼쪽에 서서 팔레트를 들고 허리를 굽히며 가족들과 함께 화폭 속에 자리하고 있다.

 

존 싱글턴 코플리: 미국의 첫 명성을 얻은 화가

 

존 싱글턴 코플리(1738~1815)는 미국 회화의 초창기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는 “미술은 예술이 아닌, 구두나 가구와 같은 유용한 교역품”이라는 당시의 현실 속에서도 독학으로 해부학을 익히며 자신의 길을 개척했다. 그는 10대 시절부터 초상화가로 이름을 날렸고, 20대에 이미 미국 미술계에서 독보적인 위치에 올랐다. 해외 전시회를 연 최초의 미국 화가로서, 코플리는 미국 미술의 국제적 가능성을 처음으로 열었다.

 

코플리는 사실적 재현 능력이 탁월했으며, 다양한 질감과 빛의 반사 표현에 뛰어났다. 그의 초상화는 불필요한 배경 소품을 배제하고 인물의 표정과 제스처에 집중했다. 고객의 의상 세부까지도 정밀히 묘사하며, 얼굴의 주름과 표정에 생동감을 불어넣었다.

 

길버트 스튜어트: 독창적인 미국 양식의 창시자

 

길버트 스튜어트(1755~1828)는 신고전주의 시기 미국 초상화의 새로운 기준을 확립한 화가였다. 그는 기존의 전통적 기법에서 벗어나 자연을 관찰하며 자신의 방식으로 피부와 질감을 표현했다. 그는 “자연을 내 눈으로 탐구하겠다”고 선언하며 기존 회화 방식을 거부했다. 스튜어트는 색채를 섞는 대신 개별적인 붓질로 피부를 묘사해 얼굴이 마치 빛나는 진주처럼 보이게 했다.

 

스튜어트는 단순한 구도로 인물의 본질을 표현했으며, 특히 조지 워싱턴의 초상화로 큰 명성을 얻었다. 그의 작품은 인물의 변하지 않는 영원성을 강조했으며, 벤자민 웨스트는 그의 회화를 두고 “캔버스 위에 살아 숨 쉬는 얼굴을 못 박은 것 같다”고 극찬했다.

 

2024.11.26 - [미술] - 바로크_이탈리아 바로크